승아와 민영 두 여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지만, 작가나 나나 민영의 입장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승아에 대한 은근한 불편함.
민영에 대한 은근한 동정? 이 느껴진달까.
난 승아같은 사람이 참 싫다.
멋대로 내 생활, 내 공간을 판단하고, 멋대로 배려하고, 멋대로 위하면서
내가 싫어하는 몇가지는 철저히 무시한다.
돈을 다 털어서 뉴욕에 와서 기껏 스타벅스와 마트 가기가 전부인 소심한 면도 참 안 맞는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신기할 때도 있다.
자신의 시간을 들여 남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 저리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일까.
아주 가끔은 그런 오지랖이 부러운 것까지는 아니지만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런 행동은 종종 친밀함이나 관계의 역동을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비슷해질 것을 강요한다면 관계에 쉽게 지쳐버린다.
둘 사이의 갈등이 친구 사이에 쉽게 겪을 수 있는 이야기 같아서 몰입이 잘 되었다.
이국에서 낯선 이들의 '선'에 지쳤을 때, 그 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오랜 친구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된다는 말에
왜, 얼마 동안, 어디에 를 생각해보라는 답.
좀 더 구체적인 답을 듣고 싶지만
함축적이어서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시간조차 승아를 제쳐놓고 혼자 앞으로 달려 가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마이크에 대해 안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 또한 마이크와는 다른 나의 사고체계 안에서의 자의적인 해석이었을까.
민영이 아는 승아는 상냥함이 지나쳐 남의 일에 관심도 과한 편이었고 글을 잘 쓰는 만큼 제멋대로 맥락을 만드는 데도 소질이 있었다. 반면 민영은 자신에게조차 혼란스러운 일을 타인과 공유할 만큼 개방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민영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공간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무리를 해가며 이 집을 구했는지를 떠올리자 착잡하고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누가 해준 것있가. 불현듯 그 사진 액자가 떠오르면서 왜 그것이 책장에 숨겨져 있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싱크대 선반을 열고 물컵을 꺼내려다 승아를 돌아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정리도 했구나. 위치가 다 바뀌었네. 그 역시 못마땅한 어조였다.
일생을 두고 모두를 준 존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더이상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큼 그녀를 무력하게 만드는 건 없었을 것이다.
승아의 성실함에는 어떤 종류의 충성도 같은 게 포함돼 있었고 사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게 더 근접한 이유였을 것이다.
일주일분의 해독주스라니. 손편지처럼 고맙고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간직하라는 말만큼이나 부담스러웠으면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하다고 해서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면 되었다. 민영은 그것을 납득시키면서 유지해야 하는 관계들이 피곤했고 적당한 기만으로 덮어두지 못하는 자신 역시 지겨웠다.
알러지 있는 거, 친구도 아니? 아니.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 언제? 글쎄. 걔한테 내가 고양이만큼 중요해졌을 때?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근데 저기 건너편은 어디니? 승아가 물었다. 맨해튼. 여기에서 보아야 한눈에 볼 수 있어.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승아는 머릿속으로 이 도시에서 남은 시간을 헤아렸다. 이틀은 더 맨해튼을 볼 수 있었다.